top of page

October 31, 2016

[2016 페미니즘 이슈] ‘낙태죄’ 폐지 운동 확산

[2016 페미니즘 이슈] ‘낙태죄’ 폐지 운동 확산

2016년을 관통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가 ‘페미니즘’이다. 지난해 ‘메갈리아’ 등장 이후 일상의 차별과 폭력에 대한 경험을 고발하기 시작한 여성들의 관심은 페미니즘으로 이어졌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생존 문제다. 여성들은 애도와 분노를 담은 포스트잇으로 강남역을 물들였고, ‘티셔츠’ 한 장 때문에 교체된 성우를 위해 여성들이 연대해 시위에 나섰으며 검은 옷을 입고 ‘낙태죄’ 폐지 운동에 뛰어들었다. 촛불 정국 속에선 대통령 퇴진과 함께 광장의 여성혐오를 비판하며 젠더 민주주의를 외쳤다. 세상의 변화를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2017년 한국 사회는 어떤 응답을 할 것인가. 올 한 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16장면을 모아봤다.

 

정부가 ‘임신중절수술 처벌 강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른바 형법상 ‘낙태죄’ 폐지 운동이 확산됐다. 지난 11월 보건복지부는 ‘비도덕적 진료 행위’를 한 의사의 자격정지 기간을 현재 최대 1개월에서 최대 1년으로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령·규칙을 입법 예고하면서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검은 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불법화하려는 폴란드 집권당에 맞선 시위 끝에 전면 철회를 얻어낸 폴란드 여성들의 ‘검은 시위’에서 착안해 검은 옷을 입고 시위에 참여했다.

 

여성들이 ‘내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정부와 의료계를 압박하자 정부는 결국 해당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보장하고, 생명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만 떠넘기지 말라’는 여성들의 요구에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형법 제269조 1항도, ‘유전적 문제나 질환, 성폭행에 의한 임신 등의 이유에 한해서만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낙태를 허용한다’는 모자보건법 제14조도 그대로다.

February 03, 2013

전국에서 ‘낙태죄’폐지 요구…외국여성들도 연대해

전국에서 ‘낙태죄’폐지 요구…외국여성들도 연대해

여성에게 재생산권을! 오백여명 결집한 검은 시위 또 열려

10월 29일, 서울 보신각 앞에서 여성의 재생산권을 요구하는 대규모 검은 시위가 또 열렸다. 성과재생산포럼, 한국여성민우회,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등 15개 단체가 공동 주최한 이번 시위에는 시민 오백여명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진짜 문제는 낙태죄”라며,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외쳤다.

 

▶ 10월 29일,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서울 종로 일대를 행진 중인 시위대.  ⓒ일다

 

검은 시위 참가자들은 “인공임신중절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규정한 보건복지부의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이 철회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을 ‘낙태죄’로 처벌하는 형법(제27장 269조, 270조)이 존재하는 한, 국가의 처벌강화 정책이 있을 때마다 여성들의 몸은 언제든 볼모로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에서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사를 고발하면서 형성된 ‘낙태 고발 정국’과 같은 상황이 언제 또 다시 연출될지 모른다. 당시 의사들이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꺼려하자,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들은 해외까지 ‘원정 낙태’를 가거나 국내에서 수백만 원에 육박하는 수술비를 감당해야 했다. 중국산 ‘가짜 낙태약’이 온라인상에서 불법 유통되기도 했다.

 

지금처럼 형법상 ‘낙태죄’가 규정돼 있는 상황에서는 암암리에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는 있다 하더라도, 병원이나 의료진에 대한 정보도 제공받지 못하고, 안전하지 않은 시술로 건강을 위협받을 수도 있으며, 터무니없이 비싼 수술비용을 요구받을 수 있고, 심지어 고발까지 당할 수 있는 것이다.

 

‘차이’를 가진 다양한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말하자

 

이 날 검은 시위에서도 참가자들의 자유 발언이 이어졌다.

 

서울에 사는 이유미씨는 “도대체 정책 입안자의 머릿속엔 뭐가 들었을까. 그들은 아마도 의사들이 반발할거라고 짐작은 했겠지만, 여자들이 이렇게 나서서 반대할 거라는 생각조차 안 해봤을 것”이라고 말하며, 보건복지부의 이번 행태를 비판했다.

 

“아마 정책입안자들은 ‘낙태죄는 살인이라는 낙인이 있는데 여자들이 감히 나서서 얘기하겠냐. 결혼도 안한 여성들이 나와서 낙태 문제 외치면 자기 사생활 드러내는 건데 감히 나서겠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자들을 얕잡아 봤다.”

 

이씨는 “왜 자꾸 낙태를 단속하려고 하는지 그 속셈이 뭘 지 생각해봤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 건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 최악의 나라라는 뜻인데, 이러한 국가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서 ‘낙태 단속’이라는 카드를 사용하는 것 같다. 낙태하는 여자들을 ‘섹스는 자기들 마음대로 하면서 애는 낳기 싫은 이기적인 여자들’로 몰고 가면, 아이를 낳아서 기르기 힘든 사회적인 맥락이 삭제되니까.”

 

▶ 10월 29일, 서울 보신각 앞에는 5백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검은 시위를 개최했다.  ⓒ일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사무국장은 ‘생명존중’, ‘국익’을 위한 출산을 논하는 국가의 모순적인 행태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산전 검사를 통해 암암리에 여아 낙태, 장애아 낙태가 이뤄져 왔고, 국가는 태어날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선별할 것을 권장해왔다. 여성들이 사익(私益)으로 인공임신중절을 선택해 온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익을 내세워 생명을 함부로 다루고 여성을 통제해 온 것이다.”

 

“점자 안내가 되어 있지 않은 임신 테스트기로는 임신 여부를 알 수 없어 누군가에게 임신 확인을 부탁해야 했던 시각장애여성, 성폭력 피해로 인한 임신에도 낙태할 병원을 찾기 어려웠던 지적장애여성, 깔창 생리대를 만든 빈곤한 십대 여성들, 이성애 정상가족 중심의 출산, 입양, 양육 정책에서 차별받았던 성소수자들은 알아서, 개인적으로 자신의 몸과 아이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 왔다.”

 

이진희 사무국장은 “우리는 국가에게 허락받는 ‘인공임신중절 허용 사유’ 리스트를 늘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차이를 가진 다양한 여성의 경험을 나누고 여성과 사회적 소수자의 관점으로 ‘재생산권’을 정의해 가겠다”라고 선언했다.

 

폴란드 여성들도 한국대사관 앞에서 검은 시위

 

이 날 시위대는 ‘낙태 합법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외국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폴란드어, 영어, 스페인어로 함께 외쳤다. 또 이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로, 유럽 국가들 내에서 아일랜드와 더불어 인공임신중절에 대해 엄격하기로 유명하다. 지난 10월초 전면 낙태 금지법(산모의 목숨이 위태로운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은 5년 징역형에 처하는 내용의 법안) 의회 통과를 앞두고,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이 법안을 폐기시킨 바 있다.

 

▶ 폴란드 여성이 보낸 연대 메시지 "폴란드 여성은 해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페미당당 페이스북

 

<페미당당> 활동가는 “폴란드 여성들은 ‘하나의 법안 막아냈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폴란드 프로라이프 단체들은 사후피임약 판매를 전면 금지하려 하고 있고, 집권 여당도 낙태죄에 관한 새로운 법안을 준비하는 등 낙태의 책임을 여성에게 강하게 물기 위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고 소식을 전했다.

 

폴란드 여성들은 한국에서 검은 시위가 열린 이 날, 폴란드 시각으로 오후 두 시에 한국대사관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위한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다.

 

아일랜드 여성들 “완전한 임신중단권 위해 싸우자”

 

수정헌법 8조를 폐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아일랜드의 여성들도 메시지를 전했다. 아일랜드는 수정헌법 8조를 통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여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있다.

 

2012년 한 여성이 낙태 시술을 거부당하고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2013년에는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울 경우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이 만들어졌지만, 이 또한 굉장히 제한적이다. 2014년에는 성폭력으로 임신한 18세 여성이 낙태 시술을 거부당했고, 단식투쟁까지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제왕절개수술을 시행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페미당당> 활동가는 아일랜드 노동당 소속 한 여성의 메시지를 대독했다.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조항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며 우리가 배운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2012년 산모의 건강이 심각한 위협에 처했음에도 임신중절수술을 받지 못해 한 여성이 사망했을 때 우리는 분노했고, 당장 이 조항을 폐지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부는 이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개정하는 것에 그쳤습니다.

 

우리는 여성의 재생산권에 대한 목소리를 낼 때, 완전히 합법적이며 완전히 안전한 임신중단권을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2년 사건 이후 아일랜드는 임신중절한 여성을 최대 14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정부와 정당이 할 수 있는 절충안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그런 종류의 토론에 부쳐져서는 안 됩니다.

 

한국에서의 임신중단권 요구 운동은 반드시 대담하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리를 외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합니다. 우리의 몸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완전한 임신중단권을 외쳐야 합니다.”

 

▶ 시위대는 폴란드어, 영어, 스페인어로 <낙태죄 폐지>를 함께 외쳤다. 이 장면은 영상으로 기록되어 낙태죄 폐지를 위해 싸우고 있는 세계여성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일다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 중인 혜원씨도 메시지를 보내왔다. 혜원씨는 “한국에서 10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지긋지긋한 여성혐오 문화를 온 몸으로 겪었다.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여성’이 아닌 ‘사람’ 대접을 받고자 온 이곳에서도 또 다른 여성혐오를 마주해야 했다”고 고백했다.

 

“이곳 아일랜드에서는 한 해 3천4백여 명의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 이웃 나라인 영국으로 향합니다. 이곳 활동가들과 함께 본 다큐멘터리에서, 영국의 한 의사가 말했습니다. 임신중절 시술을 받으러 온 많은 여성들 중에, 유독 아일랜드의 여성들만 병원에서 눈물을 흘린다고요. 다른 여성들은 모두 임신중절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기 때문에 당당한 반면, 아일랜드 여성들만 유독 이 선택에 죄책감을 느끼고 수치스러워한다고 말했습니다.”

 

혜원씨는 “여성들에게 이런 죄책감과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선택에 대해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한 결정 때문에 국가에 의해, 법에 의해 처벌 받아야만 하는 걸까요?”라고 물으며 “한국에서 싸우고 있는 여성들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낸다”고 전했다.

 

검은 시위는 이날 서울뿐만 아니라, 진주, 대전, 광주, 대구, 부산에서도 진행됐다. 전북 일대에서는 낙태죄 폐지를 위한 릴레이 1인 시위가 이어졌다. 

November 14, 2011

‘낙태’ 사회적 배경을 이야기하는 이유

‘낙태’ 사회적 배경을 이야기하는 이유
민우회, 낙태 사례집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 발간 의의
필자 회색연필님은 비혼 페미니스트 방송 ‘야성의 꽃다방’ 활동가로, 현재 대학원에서 보건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낙태 금지한 형법은 위헌' 헌법재판소 공개 변론

지난 10일 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두고 첫 공개 변론이 열렸다. 이번 소송은 2010년 부산에서 인공임신중절시술을 시행한 혐의로 기소된 조산사가 ‘낙태를 금지하는 형법 조항은 임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평등권, 신체의 자유, 사생활의 자유, 혼인과 가족생활의 존엄 등을 침해하여 위헌’이라며 소송을 청구한 것에서 시작됐다.
 
형법 270조 1항(업무상 동의낙태죄)은 임산부의 동의를 얻어 낙태시술을 한 의사, 조산사 등을 형사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날 변론에서 청구인과 법무부는 낙태죄의 실효성 여부와 임산부의 자율권 침해 여부 등 쟁점을 두고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청구인 측은 임부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했고, 법무부 측은 태아의 생명권 존중을 내세웠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낙태(인공임신중절)는 ‘불법’이다. 그러나 지난 몇 십년 간 낙태는 암암리에 이뤄져왔고,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저출산 문제’가 대두되면서 정부는 낙태율을 줄이기 위해 지금까지 쉬쉬하던 ‘불법’ 행위를 집중적으로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낙태 근절 운동을 벌여온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고발로 몇몇 병원과 조산원이 검찰에 고발돼 징계를 받으면서, 낙태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촉발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여성민우회는 낙태의 당사자이면서도 정작 논쟁에서는 배제되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22명의 여성의 이야기를 엮어 올 가을, 낙태 관련 사례집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 발간되었다.
 
여성들이 말하는 ‘낙태란 무엇인가’ 
 
▲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발간한 낙태 관련 사례집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    
사례집은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총 22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낙태 결정의 순간과 낙태를 하는 순간, 낙태 그 이후의 경험들 그리고 피임에 관련된 부분과 상대(남성)의 이야기 등으로 구분하여 엮었다.
 
사례집에 실린 각양각색의 배경을 가진 22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 다르면서도 같았다. 낙태를 하게 된 상황이나 상대에 대한 생각 등은 모두 다 달랐지만, 다들 ‘낙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과 ‘다른 여성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같았다. 그랬기에 이 어려운 이야기들을 선뜻 나서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태아를 생명권으로 보아 생명을 우선시하느냐, 아니면 산모의 선택을 존중하느냐는 논쟁은 단순히 ‘낳을 것인가, 낳지 않을 것인가’의 ‘낙태’ 행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건의료학적 측면에서 보면 태아=생명이기 때문에 낙태는 비난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난다. 그런데 보통 보건영역에서 정책을 결정할 때 단순히 건강만을 위한 것 외에도 사회경제적 요인도 같이 고려하여 판단한다. 여성의 낙태 문제 역시 보건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희한하게도 ‘낙태’만큼은 사회-경제적 요인은 간과하여 판단하고 있다. 윤리적인 이슈가 이미 형성되어 있어, 낙태 행위 그 자체만을 놓고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에 민우회에서 발간한 낙태 사례집은 이러한 ‘낙태’ 행위만을 보지 않고,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이 그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흔히, 낙태를 하는 사람들은 ‘성적으로 문란하다.’, ‘순결하지 못하다.’, ‘미혼 여성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사례집에서 드러난 바로는 그렇지 않았다. 모두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비혼 여성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기혼 여성들의 낙태경험이 많았다.
 
혼인 유무를 떠나, 그들에겐 낙태는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선택’의 문제였다. 기혼 여성의 경우, 육아를 둘러싼 경제적, 사회적 여건에 때문에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식들을 기르면서도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비혼의 경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역시 젊은 나이라 경제적인 기반 등 아이를 낳아 기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뿐더러, 사회적 '낙인' 때문에 산부인과에서도 애초부터 아이를 낳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사례집에 실린 여성들 모두, ‘낳고 싶었지만 낳을 수 없는 상황’이 문제였다고 이야기한다. 낙태는 개인의 기호가 담긴 선택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사회는 저출산을 문제 삼으면서도 왜 여성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하는지를 보지 않고 그저 낙태를 선택한 여성에게만 손가락질 한다.
 
임신은 남녀가 함께 관여해서 발생하는 문제이고, 해결 역시 남녀가 같이 풀어야 될 문제이다. 하지만, 원치 않은 임신이 닥쳤을 때, 결국 책임지는 사람은 ‘여성’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임신이 갖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러한 임신의 문제가 단순히 여성이 10개월짜리의 고생으로 인식되고, 거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감당하는 향후 20년간의 양육문제는 인식조차 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임신 사실 조차 달갑지 않은 여성들도 많을 것이다. 미혼의 임신은 순결이데올로기와 맞물려 미혼모라는 이유만으로 손가락질 당하고, 그 자식마저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경제적인 뒷받침도 미비하다. 기혼 여성이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육아는 전업주부든, 직장여성이든 누구에게나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직장여성의 경우는 더 버거운 문제이다. 임신과 동시에 직장에서는 그만두기를 강요당하고, 출산 이후 재취업이 쉽지 않아 임신을 더 꺼리게 만든다. 그 뿐인가, 맞벌이가 대세인 요즘에도 탁아시설 등의 인프라는 갖춰주지도 않고 여성 개개인에게 모성만을 강요하여 워킹맘이 슈퍼맘이 되도록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열악한 상황일 경우 누가 낳아 기르려고 하겠는가.
 
남자들도 그 수술대에 앉아 본다면…
 
무엇보다 낙태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여성을 재생산의 측면에서 보고 있다는 점은 무례하고 후진적이다.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 낙태를 금지하는 정책을 편다는 것은, 여성을 자아실현 등의 욕구가 있는 한 개인이 아니라, 아이를 낳는 존재로서  ‘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과거의 인구조절정책을 봐도 그렇다. 인구가 많았던 시절에는 낙태를 쉬쉬했으며, 남녀 모두 정관수술이나 난관수술 등을 권장하고 강요했다. 그러던 정부가 20~30여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출산률을 올리기 위해 ‘낙태’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낙태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낙태는 피임만 잘 하면 줄일 수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일부는 동의한다. 사례들을 살펴봐도 남녀 모두 피임법을 잘 몰랐던 경우가 많았다. ‘피임’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라서 덜컥 임신이 된 경우들도 있었고, ‘질외사정법’이던가 ‘체온주기법’과 같은 피임 성공률이 낮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근에 성교육이 많이 보급되었다고 하지만, 위의 사례들을 보면 아직도 성교육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피임이 완벽히 성공할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 100% 피임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성관계 시 작용하는 남녀 간의 권력구도 역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례들을 보면 여성이 피임도구 사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았다. 피임 성공률이 가장 높은 콘돔을 사용하자고 이야기 할 때 ‘헤픈 여자’, ‘경험 있는 순결하지 못한 여자’로 치부될까봐 말하지 못하거나 남성 쪽에서 콘돔 사용을 꺼려한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못하는 식이다.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요구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성관계를 맺은 사례도 많았다. 그리고 심지어 부인에게 정관수술 했다고 거짓말하는 남편들도 있었다.
 
이처럼 가부장제하에서 ‘순결이데올로기’와 맞물린 남녀 간의 권력구도가 여성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례집에서 나타난 여성의 임신 상황에 대처하는 남자들의 태도는 미숙하기만 했다. 걱정해주고 함께 고민하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나 몰라라 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 남성을 만난 어떤 여성은 ‘남자들도 그 수술대에 앉아 보면 좋겠다.’고 말한다. 오죽하면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싶다. 
 
▲ 임신출산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는 헌번재판소 공개변론일에 맞추어 '낙태 처벌 반대'를 주장하며 집회를 가졌다.  © 한국여성민우회

낙태, 말할 수 있게 하라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낙태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사례집의 몇몇 사례들에서 이야기한 ‘낙태 경험’에서 심지어 낙태를 시술하는 의료인까지도 사회적 통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낙태를 결심하고 병원을 찾은 여성들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고 말 못할 비밀을 갖게 되는데, 미혼이니 당연히 낙태를 선택할 것이라 생각한 의사며, 헤픈 여자라는 시선으로 싸늘하게 대한 간호사의 태도는 그들에게 낙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더욱 강화하게 만든다. 낙태는 축복받을 일도 아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시선의 폭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식의 ‘낙인’들이 낙태 경험을 가진 여성을 더욱 더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국내에서 낙태에 대한 정확한 수치를 파악조차 하기 힘들다고 한다. 국가에서 의료인과 일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를 했지만, 생각보다 적은 수로 나온다. 그만큼 낙태는 음성적으로 행해져왔고, 대책을 세우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성의 낙태 경험을 이야기 할 수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낙태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낙태는 여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낙태 경험을 드러냄으로써 낙태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복잡한 상황 속에서 내린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고 큰 고통이었음을 세상에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사례집을 읽기 전까지는 낙태를 경험했던 내 친구가 겪었을 고통을 깨닫지 못했으니까. 내 주변에는 낙태 경험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사례집을 읽기 전까지는 친구가 내게 낙태 경험을 이야기했다는 사실 조차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몇 년 전, 방학이라 한동안 연락이 끊어졌던 친구가 개강 후 만난 내게 가볍게 ‘애 떼러 갔다 왔다’고 웃으며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나는 ‘아, 그랬구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사례집을 읽으면서 뒤늦게 그 친구가 내게 그렇게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웃음 뒤에 숨겨진 그 친구의 아픔을 이제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런 낙태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어쩌면 여성들끼리의 연대가 형성되고, 또 그렇게 여성들이 뭉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례집 발간은 연대의 시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굉장하다. 그 맥락에서 낙태를 여성 개인의 한 문제로 볼 수 없을 뿐더러, 여성 개인의 문제로 국한시켜서 책임을 지울 수도 없다. 낙태를 금지(pro-life)냐 허용(pro-choice)이냐로 먼저 따지기 전에, 낙태를 둘러싼 입체적인 사회적 배경을 먼저 읽어야 할 것이다.

September 24, 2012

“내 자궁은 나의 것” 낙태죄 폐지운동 점화

“내 자궁은 나의 것” 낙태죄 폐지운동 점화
한국판 여성들의 ‘검은 시위’ 번진다
10월 15일 오늘,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 4백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은 폴란드의 ‘전면 낙태 금지법’ 반대 시위를 모티브 삼아 검은 옷을 입었다. (10월 초 폴란드에서는 전면 낙태 금지법 의회 통과를 앞두고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이 법안을 폐기시켰다. 당시 폴란드 여성들은 “여성의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s)은 죽었다”고 말하며 애도의 뜻으로 검은 옷을 입었다.) 인공임신중절이 불법인 사회에서, 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스스로 임신중절을 하는 것을 상징하는 ‘옷걸이’를 든 여성들도 있었다.
 
▶ 2016년 10월 15일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검은 옷을 입고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 모인 시민들.  ⓒ일다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강남역 10번 출구’ 등의 페미니스트 단체와 개인들이 함께 주최한 이 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여자도 사람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내 자궁은 나의 것. (의료계는) 거래를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로 일대를 행진했다.
 
낙태 논의에서 늘 배제돼…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번 시위의 발단은 보건복지부가 지난 9월 22일 입법 예고한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이다. 보건복지부가 의료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리수술 △진료 중 성범죄 △허가받지 않은 주사제 사용 등과 함께 ‘임신중절수술’을 시술한 경우가 포함된 것. 보건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사를 최대 12개월까지 자격 정지시키는 내용을 개정안에 포함시켰다.
 
이에 10월 9일 대한산부인과협회는 보건복지부 개정안에 반대하며 “비도덕적 진료행위에서 ‘인공임신중절’을 삭제하지 않을 경우, 개정안이 시행되는 11월 2일부터 모든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그동안 쌓여왔던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국가가 나서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권리를 통제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의사들마저 여성의 몸을 볼모로 삼는 현실에 대한 분노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움직임은 온라인에 머물지 않고 거리행동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임신, 임신중지,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는 늘 배제돼 왔다. 군부 독재시절인 1960~1970년에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을 위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치며, 피임약 복용과 불임 수술을 강요하는 한편 암암리에 시행되던 불법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방조했다.
 
수십 년간 이런 상황이 이어져오다 갑자기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한국 정부는 낙태율을 줄이겠다며 그동안 쉬쉬하던 ‘불법 낙태’ 행위를 집중 단속하겠다고 나섰다. 2010년에는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한 병원 네 곳을 고발하고, 한 여성이 남자친구로부터 ‘낙태죄’로 고소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인공임신중절 비용이 치솟고, 수술을 받으러 해외까지 나가는 ‘원정낙태’가 이뤄지는 등 ‘낙태 고발 정국’이 형성되기도 했다.
 
임신, 임신중단, 출산의 권리는 여성에게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권을 요구하는 국제단체 women on waves 
15일 개최된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낙태를 한 여성을 살인마로 몰아가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울 사회적 조건은 만들지 않은 채 애만 낳으라고 하는 사회에 대해 함께 분노했다. 또 “임신은 혼자 하나?”라고 물으며, 임신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남성은 빠져나가고 여성과 의료인만 처벌을 받는 현행법을 비판했다.
 
참가자들은 자유발언대에서 자신의 임신중절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예술가 홍승희씨는 지난 5월 임신중절을 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인도를 여행하고 있던 중, 한국에서 낙태 반대 시위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어제 귀국했다는 그녀는 “낙태를 했을 때 마치 단 한사람만 갇히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고립감에 힘들었다”고 당시 심경을 말했다.
 
“낙태를 하고 보니, 이렇게 힘든 일인데도 낙태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어요. 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회적 문제가 되지 못할까요? 원하는 임신을 할 권리,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저에겐 있습니다. 저는 살인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예비신부, 엄마이기 전에 우리는 인간입니다. 제 자궁은 공공재가 아닙니다.”
 
부산에서 왔다는 유예빈씨는 자신을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난 비혼모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술을 드시고 오면 ‘너를 낙태했어야 했다’, ‘너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 후회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가 됩니다. 낙태하지 않고 애 낳으면 ‘미혼모’가 됩니다. 왜 책임지지 않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은 없습니까? 저는 사생아고 엄마는 미혼모입니다. 그런데 왜 생물학적 아버지를 지칭하는 단어는 없을까요?”라며 성차별적인 우리의 현실을 꼬집었다.
 
‘고3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여성은 “12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학교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교육, 피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피임법을 몰라서, 혹은 상대 남성이 콘돔 사용을 거부해서 임신을 했을 때 그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교육을 하지 않은 정부의 잘못이고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남자의 잘못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회는 (십대가 임신하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섹스나 하고 다니고 임신이나 했다’고 비난합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 관리자인 안현진씨는 “매해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임신중절 수술을 한다는데, 보건복지부의 입법예고안이 통과되면 여성들은 안전한 임신중절수술을 받기 더 힘들어진다. 법 개정을 촉구해야 할 산부인과의사회가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정부를 협박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여성의 삶은 누가 결정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이어서 “여성은 출산 기계가 아니다. 자신의 몸과 관련한 행위를 온전하게 선택할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고 외쳤다.
 
▶ 10월 15일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한국판 여성들의 ‘검은 시위’ 행렬.  ⓒ일다
 
여성단체와 온라인 커뮤니티도 ‘낙태죄’ 폐지운동
 
여성단체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도 이 물결에 동참하면서 복지부의 ‘입법예고안’ 철회와 형법상 ‘낙태죄’ 폐지운동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장애여성공감, 건강과 대안 ‘젠더연구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등이 모인 ‘성&재생산 포럼’은 “의료법 개정안에서 해당 항목이 삭제된다고 하더라도 형법상 낙태죄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법과 현실 사이의 모순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사실상 인구 억제 정책, 한센병 환자 강제낙태시술 등으로 생명과 삶을 가장 많이 무시해 온 건 (여성이 아닌) 국가”라고 비난하면서, “그런 국가가 도덕과 법을 내세워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해 온 것이 바로 ‘낙태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임신중지는 처벌하거나, 그 사유를 국가에 증명하고 허가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임신도, 임신중지도, 출산도 삶의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자, 충분한 사회경제적 지원 아래 당사자가 직접 결정해야 할 일이다.”
 
‘성&재생산 포럼’은 10월 17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낙태죄 폐지 행동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여성민우회도 “더 이상 국가가 여성의 몸을 출산의 도구,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며 ‘낙태죄’ 개정을 위한 1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도 10월 23일과 30일에 광화문역 앞에서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November 07, 2012

거리로 나온 여성들 “먹는 낙태약 미프진 도입하라”

거리로 나온 여성들 “먹는 낙태약 미프진 도입하라”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단권을 요구한다

보건복지부의 ‘낙태 시술 의료인 처벌 강화’ 입법예고로 촉발된 여성들의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지난달 입법예고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일부 개정안’에 대해 의료계와 여성들의 반발이 확산되자, 보건복지부는 18일 개정안을 재검토하겠다고 물러섰지만, 이에 만족할 수 없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다.

 

인공임신중절을 불법으로 간주해 여성과 의료인을 처벌하도록 한 형법(제27장 269조, 270조) 자체가 문제이며,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외침과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선배 페미니스트들이 오랜 투쟁 끝에 호주제를 폐지했듯이, 2016년 우리는 페미니스트로서 낙태죄가 폐지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10월 23일 광화문 <워마드>와 <여성커뮤니티 연합>이 공동 주최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집회   © 일다

 

어제인 10월 23일에도 광화문에서는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와 <여성커뮤니티 연합>(‘뉴빵’ 회원, ‘여성자치도시 만들기’, ‘바코드’, ‘숲 속 갓치들’, ‘여성시대’ 회원)이 공동 주최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집회가 열렸다.

 

경구 낙태제, 왜 우린 존재조차 몰랐나!

 

2백여 명이 참가한 이 날 시위에서는 낙태죄 폐지뿐 아니라 “미프진 판매를 도입하라!”는 구호도 들려왔다. “약물로도 낙태가 되는데 정부는 왜 숨기나. 전 세계가 사용하는 ‘미프진’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위 참가자 A(26세)씨는 이렇게 말했다.

 

“낙태가 이슈로 떠오르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먹는 낙태약’을 알게 됐다. 한국에서 낙태가 불법이다 보니 불법적인 통로로 유통되고 있었다. 충격적인 건, 남성들이 여성들을 강간할 때 쓰는 최음제랑 이 약을 같이 구입하는 거다. 너무 화가 났다. 여성은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이런 약의 존재조차 모르거나 구매도 못하고 있는데, 일부 남성들이 범죄 행위에 쓰려고 구입한다니….”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이 도입을 요구한 미프진(Mifegyne)은 경구 낙태제다. 약물 성분명은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이다.

 

미페프리스톤은 약 30년 전 프랑스 제약회사 RU(Roussel Uclaf)사에서 개발해 1988년 인공임신중지용 약물로 승인됐다. 미페프리스톤은 태아가 자궁 안에 있게 해주는 호르몬인 프로제스테론 생성을 억제해, 임신 유지를 어렵게 만든다. 그 후 자궁수축 유도제를 복용하면 진통을 만들어 태아를 자궁 밖으로 배출시킨다.

 

▶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집회 참가자가 '먹는 낙태약' 미프진 판매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 일다

전세계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단권을 요구해 온 국제여성단체 ‘women on waves’에서는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 국가의 여성들에게 이 약을 보급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미페프리스톤은 현재 61개 국가에서 식약청에 등재돼 사용되고 있으며, 임신중지 성공률이 99%”라고 말했다. 임신중절 성공률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덜하다는 점에서도 안전한 임신중절 방법이라는 것이다.

 

“미페프리스톤은 세계보건기구(WHO)에 의해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받았습니다. 마취가 필요 없어 낙후된 의료 환경에서 사용하기 쉽다는 장점 때문에, 2005년에는 필수의약품 목록에 등재되기까지 했어요. 부작용으로는 자궁수축에 따른 복통이 가장 흔하고, 1~2% 정도는 출혈이나 불완전유산으로 수술적 치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임신 7주 이전에는 수술보다 약물에 의한 낙태가 더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어요. 다만 9주 이후에는 의료기관이나 의료인의 관찰 하에 약물을 사용할 것을 WHO에서도 권고하고 있습니다.”

 

미페프리스톤은 현재 미국에서는 미페프렉스(Mifeprex)라는 상품명으로, 미국 이외 지역에서는 미프진(Mifegyne)이라는 상품명으로 판매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상용 중

 

윤정원씨가 <월간 복지동향>(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발행) 2013년 6월호에 쓴 “건강권으로서 낙태 및 피임의 권리를 다시 생각한다”에 따르면, 미페프리스톤의 개발과 시장화는 의학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경로를 걸어왔다.

 

1988년 프랑스에서 최초 승인했을 때 프로라이프(pro-life. 낙태를 반대하는 세력)의 거센 항의와 대중의 우려에 부딪쳤다. 미페프리스톤을 개발한 제약회사 RU 이사진은 결국 이 약의 시장 철수를 결정했다. 그런데 오히려 프랑스 정부와 보건국이 “공중보건을 위해 약물을 계속 생산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프랑스 보건부장관 끌로드 에벵(Claude Évin)은 “나는 낙태 논쟁이 여성에게서 의학 진보의 결과물을 빼앗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 지금부터 미페프리스톤은 단지 제약회사의 상품이 아니라 여성을 위한 도덕적인 상품(moral property of women)임을 프랑스 정부가 보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이 약은 1990년 2월부터 병원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2000년 9월에는 미국 FDA(식품의약국)가 시중 판매를 승인했다. 그럼에도 논쟁은 계속됐다. 당시 여성단체들과 엘 고어 민주당 대통령 후보 등 프로초이스(pro-choice.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찬성하는 세력)은 이 약을 환영했지만, 조지 부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프로라이프는 반대했다.

 

현재 미국에서 미페프렉스는 임신 9주(70일) 이내의 경우, 병원에서 의사의 처방이 있으면 구입할 수 있다. 약물 낙태의 비중은 꾸준히 늘어나 2008년에는 미국 내 임신중절의 17%를 차지했다고 한다. (Jones, Rachel K.; Kooistra, Kathryn(March 2011) “Abortion incidence and access to services in the United States, 2008”)

 

유럽의 경우, 낙태가 강력하게 제한된 아일랜드와 폴란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미페프리스톤을 허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2009년 행해진 인공임신중절의 84%가, 스코틀랜드는 70%가 이 약물을 사용했다고 한다. 중국 정부는 1992년 자체 제약회사를 설립해 미페프리스톤 복제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 10월 23일 광화문. <워마드>와 <여성커뮤니티 연합>이 주최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집회 팻말들.  ©일다

 

낙태죄 폐지가 우선 과제!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상용되고 있음에도 임신중지가 불법인 한국에서는 미페프리스톤 도입 논의가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2010년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한 병원 네 곳을 고발하면서, 시술을 거부하는 병원이 늘어나고 임신중절비용이 치솟자 중국산 낙태약이 불법 유통되기도 했다. 현재도 약국 이름을 걸고 온라인 판매를 하고 있는 사이트가 운영 중이다.

 

<성과재생산포럼> 기획위원이기도 한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안전성과 효과성이 검증된 성분이긴 하지만, 현재와 같이 복약지도 없이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미페프리스톤과 같은 약물 도입도 공론화 되어야 하지만, 우선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라는 설명이다.

 

한편,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와 <여성커뮤니티 연합>은 오는 30일에도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Please reload

bottom of page